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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의 아세안ABC 4] 미얀마 총선, 어떻게 보아야 하나

총선 전날 예측 세 가지 시나리오 ...훌라잉, 총사령관직 유지하며 대통령 나설수도

 

12월 28일, 미얀마 총선을 하루 앞두고 이 글을 쓰는 일은 솔직히 말해 조금은 모험이다. 대부분의 평가는 사건이 벌어진 뒤에야 쏟아진다. 틀릴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 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늘 아쉬웠던 점은, 미리 생각하고, 미리 기록하지 못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래서 총선 전날이지만,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쓴다.

 

요즘 국내외에는 미얀마 전문가가 넘쳐난다. 유튜브만 켜도 ‘미얀마 총선 전망’ 영상이 줄줄이 뜬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전문가라기보다, 전문가의 언어를 보통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통역자에 가깝다.

 

■ 미얀마와의 몇 가지 기억

 

미얀마와의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됐다.  1999년,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 때였다. 당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뜻밖의 지시를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미얀마 군부의 최고지도자 탄쉐와 양자회담을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이 외면하던 시절,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이던 김대중 대통령이 그를 만난다는 건 탄쉐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결정에는 김대중 대통령 특유의 외교 철학이 담겨 있었다. 왕따시키기보다 대화를 통해 변화를 유도한다.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려 했던 햇볕정책과 닮아 있었다.

 

미얀마는 늘 그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2005년 외교부 동남아과장 시절, 출근하자마자 “수도를 양곤에서 네피도로로 옮긴다”는 전문을 보고 한동안 멍해졌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2015년에는 외교부 아세안 국장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모시고 양곤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때는 분명히 ‘미얀마의 봄’이었다. 아웅산 수지가 국가고문으로 정상회의를 주최했고, 미얀마는 2015년 처음으로 아세안 의장국을 맡았다.

 

2019년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때는 준비기획단장으로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 국가고문의 참석을 직접 챙겼다. 유일한 여성 정상이라는 점을 고려해 회의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파우더룸을 마련했던 소소한 기억도 남아 있다.

 

 

■ 다시 쿠데타, 그리고 다시 총선

 

그러다 2021년 2월, 내가 멕시코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미얀마에서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약 5년, 민 아웅 훌라잉 임시 대통령 겸 군 최고사령관 체제가 이어졌고, 이제 군부는 총선을 통해 2026년 3월 민간정부 출범을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냉소적이다. 이번 총선을 ‘무늬만 총선(sham election)’이라 부르는 이유도 분명하다.

 

아웅산 수치가 이끌던 NLD는 해산됐고, 친군부 또는 군부 우호 정당만이 선거에 참여한다. 진성 야당과 다수 소수민족 정당은 보이콧을 선언했다. 결과는 사실상 정해져 있다는 분석이다.

 

2015년, 군부는 선거를 치르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가 NLD에 참패했다. 이번에는 그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긴 채 어떤 방식으로든 이기는 선거를 준비해 왔다고 봐야 한다.

 

■ 총선 이후, 세 가지 시나리오

 

총선 이후 권력 구도를 두고는 세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첫째, 훌라잉 최고사령관이 대통령에는 나서지 않고 군 수장 자리에 머무는 경우다. 군부 내부 권력 역학을 감안하면 가장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둘째, 훌라잉이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며 대통령으로 나서는 시나리오다.

 

총선 후 흠결있는 선거라는 국제사회의 평가가 거세질 경우, 뒤에서 실권은 여전히 갖고 있는 방식일 것이다. 자신은 총사령관직을 유지하며 허수아비 대통령을 임명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국제사회는 군부의 권력 독점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셋째, 훌라잉 총사령관은 총사령관직은 내려 놓고 대통령만 하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의 경우 국제사회, 특히 아세안은 절차적 정당성을 거친 민선 정부에 대해 공공연한 비난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둘째 또는 셋째 시나리오나 양 시나리오의 어떤 변형이 현실적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

 

 

■ 국제사회의 시선: 미묘한 침묵

 

미국의 최근 국가안보전략서(NSS)를 보면 미얀마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민주화라는 ‘돈 안 되는 의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군부를 보호하면서도 총선 이후 영향력 유지를 최우선으로 할 것이다.

 

아세안은 더 애매하다. 총선에 큰 기대는 없지만, 내정 불간섭 원칙상 노골적인 부정 평가도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아세안의 반응은 “총선이 실시됐고, 민간정부 출범과 5대 합의(5PC) 이행을 기대한다”는 모호하지만 계산된 메시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나는 한국의 대응 방향을 ‘원칙 있는 실용주의’라고 정리하고 싶다. 두 개념이 조응하는지 논란이 있지만 외교가 그런 것 하라고 있다.

 

기준은 세 가지다.

 

첫째, 사실 기반(Fact-based): 서구의 프레임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현지의 실제 변화 가능성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둘째, 이익 기반(Interest-based): 미얀마의 지정학적 중요성, 한국 기업과 교민 보호는 외교의 현실이다.

 

셋째, 국민 기반(People-based): 쿠데타의 최대 피해자는 언제나 미얀마 국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용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외교가 필요하다. 경제 제재는 유지하되, 인도적 지원의 숨통은 틔워야 한다. 아세안 인도적지원 선터(AHA센터)나 아세안+3(한중일) 비상쌀비축제도(APTER)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투명한 지원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용한 비공식 채널을 끊지 않는 것이다. 불교계, 학계, 지방정부, 그리고 오래 쌓아온 인적 네트워크는 위기 국면에서도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한다.

 

■ 총선 이후 차분하게 원칙적인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원칙은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한 원칙은 아무도 돕지 못한다.

 

미얀마의 지정학, 아세안의 내부 역학, 한국의 국익, 그리고 미얀마 국민의 일상을 함께 보며 원칙 있는 실용주의로 접근할 때, 비로소 한국의 대미얀마 정책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총선 이후의 미얀마를 조금 더 차분하게, 그러나 끝까지 지켜봐야 할 이유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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