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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5] 응웬 후이 티엡의 베트남 단편소설 ‘옛사람들’

도이머이 이후 혜성처럼 등장 응웬 후이 티엡 '20세기 최고의 베트남 작가'평가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여행자의 전설> <이웃(HÀNG XÓM)> <천지가 진동할 얘기(Chuyện Động Trời)>에 이어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를 5번째로 싣는다. 응웬 후이 티엡(Nguyễn Huy Thiệp)은 도이머이 이후 <퇴역장군(Tướng về hưu)>이라는 단편소설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다. <편집자주>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

 

“옛사람들

지금 혼은 어디에 있는가?”

-부딩리엔-

 

 

1.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나는 수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N성(省)에 있는, 여우와 원숭이가 울부짖는 산 구석에 자리잡은 범(Bâm)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때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한 스무 살의 나이로 아주 어벙할 때였다.

나와 한방을 쓰던 동료는 수학을 가르치던 조아잉이었다. 조아잉은 내 나이보다 두 배나 되었고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그가 물었다.

“나는 징계를 받아서 이곳까지 밀려왔네만 자네는 무슨 업장이 있길래 이 구석으로 들어왔나?”

나는 자원해서 이 산속으로 가르치러 왔고 그런 것이 젊은이의 열성이라고 말했다.

“알았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야말로 학교 교육의 쓰디쓴 약을 삼켰구먼. 청년이란 그런 것이야! 자네들은 이빨이 튼튼하니 돌멩이도 부술 수 있지.”

나는 조아잉에게 왜 징계를 받았는지 물었다.

“눈먼 몽둥이의 쾌락 때문이었지만,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네.”

나는 다시는 묻지 않았지만, 후에 그는 조목조목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정말 웃기는 얘기였다. 통상적으로 남녀관계에 관한 얘기는 모두 웃기는 것 아닌가.

나와 조아잉이 가르치는 학교는 엉성하게 대충 만든 속성 과정의 학교였다. 학교장은 장교 출신의 안(An)이란 자였는데, 성격이 엄격하고 고독한 표정에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안의 부인은 나와 조아잉 그리고 그 마을에 아내와 자식을 둔 두 명의 타이족 교사를 위해 밥을 제공했다. 그들은 보통 오후 수업이 있는 날, 매주 세 끼의 점심을 학교에서 먹었다.

이 학교에 수업을 받으러 오는 학생들은 차농장과 산림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30명이 조금 넘었고 두 학급으로 나누어졌다. 우리는 어찌 되었든 간에 2년 안에 그들이 고등학교 과정의 지식을 갖도록 한 다음에 졸업장을 주어야 했다. 조아잉이 말했다.

“우리의 교육은 모든 일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기하학의 증명, 물리의 법칙, 역사 공부 등은 모두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이상적으로 조직된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모두가 거짓말! 무리야! 실제로 세상은 전부 혼돈 속에서 우연히 건설된 것이지 규칙 같은 것은 없거든. 인간은 본래 연약한데, 그들은 고단한 삶을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이상을 갖고자 합리적인 논리로 자신을 달래는 것 아닌가?”

안의 부인 힝(Hinh)씨가 말했다.

“아이고! 티엠(티엠은 내 이름), 귀를 막아! 총각은 그 늑대 말을 듣지 마. 저 사람 무슨 양심이 있는 줄 알아! 총각은 공부나 잘 가르쳐!”

조아잉이 말했다.

“잘 가르친다! 자네 이 무식한 여편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나? 누구를 잘 가르쳐? 어리석은 무리가 여기 와서 공부하면서 그들이 배우는 것이야말로 빛이요 문화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있음으로써 모든 일이 잘될 거로 생각하지... 그러나 그들은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야. 자네 안 씨 부인을 생각해 보게. 그녀는 문맹이지만 선량하고 요리도 잘 하지 않는가? 그러나 만약 그녀가 공부했다면 그러한 일들을 견뎌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맹세할 수 있네. 그녀는 우리를 굶겨 죽였을 거야!”

힝 부인이 말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어! 나는 단지 가족을 돌보고 자네들을 위해서 밥 짓는 일밖에는 몰라. 내 직업이지!”

조아잉이 말했다.

“정말 무식하구먼! 이 여자는 어둠 속에서 행복하고, 암흑 속에서 선량하다네.”

교사의 부족으로 나는 거의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나는 스스로 공부해야 했다. 강의안을 준비하는 일은 내 시간을 아주 많이 뺏어갔다. 그런데 조아잉은 결코 강의안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학생들은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그가 수업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조아잉이 말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대수나 기하학이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 또 가르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 자신도 이해하는 것이 없는 걸. 그러나 나는 대수와 기하학을 만들어낸 사람이 어떠했는지는 항상 얘기한다. 피타고라스와 유클리드에 대해 말해준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학생들은 기회가 온다면 자신들이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또 말했다.

“학문이 위험한 것은 사람들에게 본래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자신과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망상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인간이 이 썩은 환경에서 또 다른 썩은 환경으로 옮겨가는 것뿐일세. 한 곳에 편안히 있는 것이 덜 고통스럽고, 덜 비극적이네.”

안 교장은 우리들의 얘기에 거의 간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 부인이 말했다.

“아이고! 이 노인네가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그 노인네의 직업은 사람 죽이는 것이야! 이제 화제를 돌려 사냥 얘기나 합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노인네가 결코 제대로 쏘아서 잡은 적이 없다는 것이지.”

그러나 안 씨가 약 8킬로그램쯤 되는 원숭이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가 명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원숭이가 절름발이였기 때문이었다. 힝 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아이고! 두 살짜리 어린애와 똑같구먼! 인간도 아냐! 어찌 저것을 쏜단 말인가! 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 좀 봐!”

힝 부인은 결단코 원숭이를 요리해주기를 거부하며, 묻으라고 했다.

안 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쩌지?”

조아잉 대답했다.

“산속으로 끌고 갑시다. 내가 학생 두 명을 빼서 요리하라고 할 터이니.”

힝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그 고기를 먹는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 말아요!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사람 고기를 먹는 것과 다를 바가 무어요? 짐승이나 그런 것을 먹지...”

조아잉이 말했다.

“옛날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 같은 왕도 인육을 먹었는데, 무슨 문제인가! 그리고 안 씨가 안 먹는다면 무슨 사냥꾼인가, 또 우리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가?”

원숭이 고기는 개고기 조림처럼 요리되었다. 아주 달았지만, 비위가 상했다. 우리는 힝 부인이 그릇과 젓가락을 빌려주기를 한사코 거부했기 때문에 산속에서 손으로 먹어야 했다. 안 교장은 술을 마셨고 기분이 좋아져서 산적을 잡은 것처럼 원숭이 잡은 얘기를 해댔다.

“그놈 아주 고단수야!” 안 씨는 계속 되뇌었다. “원숭이지만 아주 노련해!”

조아잉이 말했다.

“그럼 노련한 원숭이라고 부릅시다.”

안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술 취한 사람의 웃음은 정말 상쾌하고 호탕했다.

 

2.

보통 봄이 되면 힝 부인은 우리에게 죽순을 캐다가 저장하게 시켰다. 막 캔 죽순을 데치면 하얀색이 되었고, 닭 삶은 물에 파꽃과 닭 껍질을 넣고 요리하면 노란 국물에 작은 별들이 수없이 떠 있는 것 같았다. 힝 부인은 남은 죽순을 말려서 우리가 휴가 때 선물로 가져가도록 했다.

조아잉이 말했다.

“마른 죽순과 고슴도치 털, 야생 닭털 같은 선물은 우리 가족에게 내가 지옥이 아니라 신선 세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거든.”

힝 부인이 받았다.

“그렇다면 자네는 가져가지 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아잉이 휴가를 갈 때면 힝 부인은 여전히 그것을 싸주었고, 조아잉 역시 받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항상 환경과 풍습에 항복해야만 돼. 그럼으로써 우리가 교육을 받았고, 문화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지. 정말 곤란하구먼! 어찌하면 내가 저 산 굴속에 홀로 사는 오랑우탄의 힘을 갖게 될 건지?”

학교 가까이에 있는 동굴에 거의 100㎏이나 나가는 오랑우탄 수컷이 살고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동굴 밖으로 나와 털을 말렸다. 밤에는 음침하게 울어대는 소리가 사람의 소리와 같았다. 우리는 그놈이 산등성이에 서서 학교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추잡한 행동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저 행동이 우리들의 교육에 대해서 비평하는 것이다.” 조아잉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일리가 있어.”

안 씨가 화를 냈다.

“조아잉 자네!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사람들은 자네같이 함부로 말하는 놈은 감옥에 처넣지.”

조아잉이 대답했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함께 살고 있지 않소?”

안 씨가 내게 말했다.

“티엠 자네! 자네는 스스로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하네. 조아잉 녀석은 내가 보기에 아주 험한 놈이야. ‘우리가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니’가 무슨 말인가?”

힝 부인이 거들었다.

“무슨 뜻이긴요? 즉 우리가 함께 감옥에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함께 살고 있다’라고 한 것 아니에요?”

안 씨 부부는 도시에서 대학에 다니는 수언이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집에 다니러 왔다. 그녀가 돌아오면 우리들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면 전에는 느낀 적이 없는 맥빠짐과 황량함이 맴돌았고 갑자기 그러한 씁쓸함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 의자는 우리 딸 수언이 전에 앉았던 것인데.” 힝 부인이 말을 이었다. “자네들 여기에 솥을 올려놓으면 안 돼! 티엠 총각! 우리 딸이 올 때마다 더 예뻐진 것 알지?”

조아잉이 말했다.

“날로 더 요염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야! 그것은 도시 문명을 받아들인 결과이지. 불쌍한 어머니! 아줌마는 점점 딸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학문과 편리함이란 것이 그녀의 손톱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그녀의 침은 독약이 되게 하고, 그녀의 심혼에 거미줄을 치게 만든 것이지. 나는 옛날에 찻잎을 따던, 손톱도 없고, 손가락은 보통 사람의 1/3 정도로 닳았으며 손등이 두툼하여 후덕하게 보이면서도 결코 부서질 것 같지 않은 마음을 가진 그녀의 손을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조심하지 않으면 전부 세균에...”

힝 부인은 미칠 듯이 화가 났다.

“나쁜 놈! 어찌 네놈의 주둥이는 그리도 악독하단 말인가?”

조아잉이 대답했다.

“됐어요, 됐어! 다시는 말 안 하겠소. 진리는 언제나 잔인한 것이어서 듣기가 괴로운 거지. 예, 당신 딸 예뻐요. 잘 생겼어요...”

힝 부인이 말했다.

“그렇지? 내 딸의 걸음걸이를 보면 어디가 요염한가? 도시에서 공부시키는 것이 얼마나 돈이 드는데. 얼마를 줘도 아깝지 않네.”

힝 부인은 딸이 오는 것을 보고 정신이 마중 나가느라 밥을 설익힌 적이 있었다. 안 씨는 밥을 먹지 않고 총을 메고 숲으로 사냥하러 갔다. 힝 부인이 나에게 물었다.

“티엠 총각! 내 딸이 총명하다고 생각하는가?”

조아잉이 대답했다.

“여자가 총명하면 결혼하기 힘들고, 결혼하더라도 행복하기 힘들지.”

힝 부인이 말했다.

“단지 편안하기만 바랄 뿐이지.”

조아잉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 그것이야말로 필요한 것이란 말이야!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총명은 필요 없는 것이지... 이번에 갈 때 얼마를 주었소?”

힝 부인이 대답했다.

“있는 대로 다 주었지만, 성에 차지 않은 것 같더군. 부모가 가난하니 자식도 손해 볼 수밖에 없지 않겠어!”

조아잉이 내게 속삭였다.

“진솔하고 불쌍한 어미! 자네 그 딸년의 하얀 눈을 관심 있게 보았는가? 그 신데렐라 공주는 양보가 없다네! 계속 기다리면 효도하겠지!”

 

3.

한적한 산골 마을의 생활은 단조롭고 쓸쓸했다. 오후가 되면 저 멀리 산자락에서 물소 방울소리가 들리고, 보라색 연기와 섞인다. 그리고 초기 어둠이 옅은 보라색으로 나무 주변을 조금씩 감싸고 있다가 큰 나무 가장자리를 회색으로 물들이다 결국은 숲 전체를 어둠으로 덮는다. 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무리를 부른다. 오랑우탄은 구슬피 울부짖는다. 세 번에 한 번씩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운다.

나와 조아잉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밥을 먹는다. 둘은 말이 없었다. 힝 부인은 아궁이 옆에 앉아서 중얼중얼 자장가를 부른다.

“아, 흔들이는 대나무 다리 건너기 힘들지만...

그래...

엄마가 학교에 보내줄게...

아아... 엄마는 인생 학교로...”

 

조아잉이 말했다.

“자네, 티엠! ‘엄마가 인생 학교에 간다’라는 말이 냉소적으로 들린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나? 여자의 ‘인생 학교’라 너무 모호하지 않나? 이 자장가를 부르는 젊은 엄마는 시장, 터미널, 식당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것 같은 느낌이야. 이런 교실에서 선생들은 이 젊은 엄마에게 무슨 진리를 가르치지?”

 

식사를 마치고 나와 조아잉은 조용히 방으로 물러나 쉬었다. 방은 12㎡로 가운데 문이 있고 양쪽 벽으로 조그만 침대가 있고, 침대 머리에는 옷과 책을 넣을 수 있는 옷장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몹시 추운 날에는 방 가운데에 불을 피웠다. 따뜻한 것도 따뜻한 거지만 연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면 한밤중에 일어나서 장작을 빼냈다. 11월이 되면 서리의 계절로, 낮에는 건조하고 밤에는 몹시 추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서리가 풀잎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서리는 여러 나무를 죽게 했다. 심지어 무성한 바나나잎도 마르게 했다. 밭에 심은 채소도 말라 죽었다. 단지 흐몽족이 심은 고양이 채소만 살아났다. 그것도 계속 물을 주고 밤새 덮어주어야 했다. 여러 번 우리는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탁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산을 보니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산 위의 불빛이 우리를 비추는데, 모두 초췌하고 생각에 잠기 모습이었다. 말이 필요 없이 우리는 이곳에서 산불이 나면 끌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불씨가 바람에 날려 학교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내일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4.

우기는 보통 두 번이 왔다. ‘찌엠 비’라고 하는 바는 여름이 시작되는 4월에 시작된다. 산자락에서부터 검은 구름이 올라오고, 천둥과 번개가 몇 시간 계속되면서 회오리바람이 폭풍으로 변하고 먼지와 쓰레기를 감아올린다. 그러면 비가 온다. 엄청난 비가 콸콸 쏟아지다가 한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햇볕이 들고 다시 쨍쨍한 날씨가 두세 달 이어진다. 놓아 기르는 돼지들은 그늘을 찾아 누워서 숨을 헐떡인다. 7, 8월로 넘어가면 비로소 정식 ‘우기’가 시작된다. 비는 미친 듯이, 고문하는 것처럼 끈질기게 억누르는 것처럼 비가 내렸다. 홍수가 나서 흙을 쓸어내고, 집을 쓸어내렸다. 뱀이 비를 피해 옷장이나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경우도 많았다. 우기는 9월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새봄이 되면 다시 비가 왔다.

어느 해 우기가 왔을 때 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오후 5시쯤, 두 타이족 교사 중 한 사람인 타잉이 급하게 달려왔는데, 몸이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타잉은 우리에게 산통을 겪고 있는 아내를 병원에 즉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여성 혼자서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출산일이 다가오면 밭 한 구석 또는 산속에 작은 움막을 짓고, 여성이 그곳에 들어가서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게 했다. 여성은 누워서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출산하고, 출혈이 심하면 죽는 일도 있었다.

우리는 그 얘기를 듣고 새파랗게 질렸다. 병원은 약 40㎞ 떨어져 있었다. 타잉의 부인이 움막에 들어간 지 5시간이 넘었다. 우리는 상의한 후에 그녀를 가장 가까운 농장으로 데려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우리가 움막에 도착했을 때 큰비가 내렸다. 벌건 흙탕물이 움막 주변으로 흐르고 있었다. 타잉의 부인은 기절했다. 우리가 그녀를 옮기려 하자 타잉 집안사람들이 못하게 했다. 안 씨가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발사했지만, 여느 때처럼 총알이 하늘로 날아갔다. 그런데 타잉 부인이 살아나서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그 잔인한 출산을 기념하기 위해 나중에 행운이라는 의미의 ‘마이’로 이름 지어졌다.

조아잉이 말했다.

“자연적인 환경에서 모든 일은 세밀하고 자연스럽게 선택된다. 자연의 대응력은 아주 크다. 어둠과 위험 속에 사는 우리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지만, 의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결국 서로는 같을 뿐이다. 즉 빠르거나 늦거나일 뿐이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잔인하고 노골적인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어떤 힘, 어떤 습관과 인내가 우리가 살아낼 수 있고, 그와 같은 고난과 고생 속에서 불평 없이 지내도록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습관과 인내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내가 범에서 생활했던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쁨과 슬픔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당시 나는 어렸고, 자주 잊어버렸으며, 마음에 두는 일이 없었다. 찾아온 기쁨도 크게 느끼지 못했고, 슬픔도 아프게 느끼지 못했으며, 아주 깊은 추억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일은 기억의 한구석에 쌓아두었다. 마치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것처럼.

후에 나는 여러 곳을 다녔고, 여러 직업을 가졌으며, 가르치는 일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항상 마음속에 불안을 느꼈다. 내 속의 어떤 갈망이 재촉하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운명이 나를 그렇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범에 약 2년 조금 넘겨 있다가 조용히 떠났다. 나는 내 앞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 내 삶을 묻을 수는 없었다. 내가 범을 떠나던 날은 모든 사람과 모든 일 역시 보통날과 같았다. 내가 떠나고 나서 30년 뒤에 다시 돌아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나 역시도 몰랐다.

그날 나는 매번 나무를 하러 가거나 혼자서 놀러 갈 때처럼 걸어서 숲으로 갔다. 골짜기를 지나 오랑우탄 산 정상에 올라 멀리 바라봤다. 산과 산이 마치 잭푸루트의 과육이 겹겹이 쌓인 것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산자락 끝에는 반짝이는 별 하나가 점점 햇빛에 차례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그 별이 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5.

지난해 9월에 나는 범에 돌아올 기회가 있었다. 삼거리에서 학교 쪽으로 꺾을 때, 오랑우탄 산을 바라보았다. 나는 감동해서 심장이 뛰었다. 지금은 초가을, 들국화가 노랗게 피었다. 하얀 나비가 길 양쪽으로 따라 날고 있었다. 들국화 향이 낯익으면서도 낯설게 여운을 남긴다. 예전에 내가 여기에 있었고, 이 길을 걸으며 꿈을 꿨었다. 내 삶을 위해 수많은 계획을 세웠었다.

 

 

옛 학교는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풍경은 이제 옛날과 달랐다. 대략 10여 채의 시멘트로 지어진 거리가 생겨났다. 한참을 물은 후에야 나는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옛날 그 어린아이 ‘마이’는 이제 서민식당의 주인이 되었다.

“옛날 학교에 계신 분들은 이제 거의 없어요. 저희 아버지도 지난해에 돌아가셨어요.” 마이가 말했다. “교장 선생님 안과 힝 부인도 돌아가신 지 오래됐어요. 묘지는 오랑우탄 산에 있어요. 아저씨 성묘를 하고 싶으시면, 저 애꾸눈 아이에게 2천 동 주고 산으로 안내해달라고 하세요.”

마이가 말했다.

“제가 신문을 읽었는데요, 아저씨가 작가가 됐고 미국도 가고 프랑스도 가고 부자 되셨다고 하던데요. 옛날에 여기에 계실 때 아저씨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마이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작가가 무슨 직업이길래 그렇게 빨리 부자가 됐어요? 조아잉 아저씨(아, 아저씨 조아잉 아저씨 기억하죠?)는 아직도 여기 사세요. 그분은 평야 지역의 아내를 버리고 타이족 과부를 얻었어요. 지금은 산속에 사는데 아편에 중독됐어요. 아저씨 찾아가고 싶으면 저 애꾸눈 아이에게 2천 동 주고 데려다 달라고 하세요.”

나는 마이에게 고맙다고 하고, 작은 선물을 준 다음에 애꾸눈 아이를 따라 조아잉 씨 집을 찾았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옛사람의 묘를 찾았다.

조아잉은 해오 마을의 끝에 있는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지만 마르고 흰 수염에 흰머리,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산 것처럼 창백한 피부의 노인이 옛날 조아잉이라고 알아볼 수 없었다.

조아잉이 속삭였다.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 돈 있으면 한 푼 줍쇼... 아편 사게.... 나는 티엠을 몰라... 아무도 몰라... 아주 슬퍼... 누구를 가르치나...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공부는 무슨....”

불쌍한 노인은 벽으로 얼굴을 돌리고 흐느꼈다. 나는 조아잉 부인에게 돈 몇 푼을 쥐여주고 나왔다. 애꾸눈 아이가 나를 오랑우탄 산으로 안내했다.

“몇 년 전에 화려한 한 아주머니가 이 묘지를 찾아왔었어요.” 애꾸가 말했다. “그 아주머니가 잠시 울고 나서 5천 동을 주었어요.”

나는 무성한 풀로 둘러싸인 두 개의 돌무덤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옛날 안 씨는 이곳을 가장 좋아했었다.

나는 안 씨와 힝 부인을 위해 향을 피웠다. 그리고 그 중후하고 간소한 영혼이 안식을 갖도록 기도했다.

나는 산 아래로 내려와 애꾸눈 아이에게 돈을 지급했다. 화려한 부인은 수언이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그녀처럼 나도 아이에게 5천 동을 주었다.

 

번역: 부산외국어대학교 배양수 교수

 

 

배양수 교수와 응웬 후이 티엡의 인연: 배양수 교수는 응웬 후이 티엡이 세상을 떠날 때 아세안익스프레스에 추모사를 올리기도 했다. 배 교수는 2001년 구정 전에 그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난 이후 여러 번 인터뷰했다. 한 번은 하이퐁과 타이빙성을 그와 같이 여행한 적도 있다.

 

배 교수는 응웬 후이 티엡이 ‘퇴역장군’으로, 일부 장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고, 결국 가택수색과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흥미 있고 독특한 필법과 과감한 현실 반영, 새로움의 모색으로 베트남 문학에서 이정표를 세웠다.”

 

그는 "베트남에서 원고료로만 먹고사는 작가는 자신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배 교수에게 한국 영화감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응웬 후이 티엡은?

 

응웬후이티엡(1950.4~2021.3)은 도이머이 이후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다. <퇴역장군>이라는 단편소설로 단번에 이름을 알린 작가이다.  ‘베트남 문학사서 가장 많은 평론을 기록한 최초의 작가’로 추앙받았다. 20세기 최고의 베트남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개방 초기 베트남 사람들이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어떤 것이 시장경제인지 잘 모를 때, 시장경제 체제의 냉혹함을 극명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즉, 베트남 민족의 영웅인 장군도 시장경제 체제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베트남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노이 사범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서북부 산악지역에서 교사로 10년을 근무한 후에 하노이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출세작 <퇴역장군>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또한 ‘장군’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때 잠시 붓을 놓고 식당을 운영한 적도 있다. 소설뿐이 아닌 시나리오와 시와 에세이로도 주목받았다. 

 

그의 소설은 <숲의 소금> <무왕> <물신의 딸> <소어즈> <나라사랑> <강가로> 역사 단편 3부작 <검칼>, <화금>, <품위> 등이 있다. 프랑스 문학예술훈장(2007년)과 국가상(2022년)을 받았다.  2021년 3월 20년 향년 71세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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