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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7] 밍쭈엔 작가의 ‘고엽제 후유증’ 르포 ‘숨겨진 상처’

전장서 10년 군의관 경험...“20대가 70대 노파” 등 기형-유전 등 ‘비극’

 

아세안익스프레스가 계묘년(癸卯年) 신년을 맞아 베트남 소설 <열세 번째 나루(Mười ba bến nước)> <여행자의 전설> <이웃(HÀNG XÓM)> <천지가 진동할 얘기(Chuyện Động Trời)> <옛사람들(Những người muôn năm cũ)> <생쥐 띠의 실종(Tí chuột mất tích)> 등 6편을 실었다. 마지막으로 밍쭈엔(Minh Chuyen) 작가의 르포 ‘숨겨진 상처’를 싣는다. <편집자주>

 

 

숨겨진 상처

 

전쟁은 지나가고 과거가 되었다. 시간과 삶은 모든 지역과 신체에 있던 상처를 점점 아물게 했다. 자연의 푸름과 나무는 전쟁 때의 비참했던 흔적들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인간의 아픔과 그들의 몸속에 숨겨진 후유증으로 인한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홍강(紅江) 하류에 있는 조그만 땅 타이빙(太平), 좁고 인구도 얼마 안 되는 이곳은 5만 명이 넘는 열사가 있고 수십만 명이 전쟁 후유증을 앓는 곳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 3대가 후유증을 겪고 있는 일도 있다. 그것은 미국이 남부에 쏟아부었던 다이옥신의 후유증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을 건설하고, 집을 짓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그 화학물질이 그들의 오장육부에 침투해서 손자까지 전해질 것이라고 누가 의심했겠는가? 피를 흘리지도 않은 조그만 상처지만 끊임없이 아픔을 주고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들 자식의 일생을 은밀하게 파괴하고 있다.

 

나는 참호 속에서 함께 미국과 싸웠던 동료들의 가정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총성이 사라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곳 가정은 한시도 평온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너무도 잔학한 전쟁에서 미국이 일으킨 죄악 때문이었다. 평화는 왔지만, 그들 가정에는 밤마다 ‘폭탄’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천벌과 같은 그 그림자가 그들을 따라서 마을로 왔고 그들을 포위해서 그들의 가정을 파괴했다.

 

자갈길과 낡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서 우리는 띠엔하이(Tien Hai), 프엉꽁(Phuong Cong) 마을에 도착했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에는 ‘외계’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제4구에 사는 당반밍(Dang Van Minh)의 두 자식이 외계인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소문을 낸 것이었다. 나는 외계인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밍씨의 딸은 정말 괴이했다. 그의 큰딸은 당밍응옥(Dang Minh Ngoc)으로 20세이고, 둘째는 당밍후에(Dang Minh Hue)로 18살이었다. 둘은 모두 한창 청춘의 나이였다. 병들지 않았다면 그들은 마을의 예쁘고 착한 처녀였을 것이고, 마을 총각들이 좋아할 그런 나이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응옥과 후에는 70이 넘은 노파의 모습으로 길모퉁이에 오랑우탄처럼 앉아 있었다. 두 눈은 불룩 튀어나왔고 입은 축 처졌으며 피부는 비늘과 주름이 졌고, 희었다. 머리는 큰 주전자만 하고 대머리였다. 두 발은 너무 작았고 제대로 걸을 수 없으며 지팡이를 이용해서 온종일 걸어도 집안에서 마당까지밖에 갈 수 없다고 했다. 항상 덜덜 떠는 혀를 밖으로 내고 있었다. 밍씨는 그들을 20여 년 기르고 있지만 말을 못 해서 아버지, 어머니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에 당신은 어디에서 전투했고, 얼마나 했으며, 다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꽝찌(Quang Tri), 케사잉(Khe Sanh)에서 7년 넘겨 있었으며, 전투 중 많은 동료가 희생되고 다쳤지만 나는 한 번도 총상을 입은 적도 없고 단지 딱 한 번 화학물질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71년 5월 21일 밤, 케사잉의 쯔퐁(Chu Phong) 고지에서 내가 초소장을 하고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밤중에 머리 위에서 비행기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비행기는 서너 번 왔다 갔다 하고는 조용해졌다. 몇 분 후 그들은 현기증이 나고 눈물이 나면서 목이 쓰라리고, 통증을 느끼면서 기절했다. 다음날 아침 소대장 응웬반훙(Nguyen Van Hung)이 초소에 올라와 세 사람이 기절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병원으로 후송을 시켰다. 다음날 깨어나자 동료들이 ‘어제 미국 비행기가 화학물질을 뿌려서 너희들 죽을 뻔했는데 운 좋게도 병원에서 살린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그날 밤 우리가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면 오늘 이러한 자식들은 없었을 것이다. 애들을 쳐다보면 불쌍하기 그지없다.”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러나 여러 번 전쟁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조국이 평화를 얻었고 모든 집이 행복하니 우리 가정의 손실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가 이미 희생된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단호하고 감동적인 말을 했다.

 

그는 말하면서 눈을 끔벅거렸다. 나는 그것이 용감한 전사로서 아픔을 참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이투이(Thai Thuy) 현의 투이쯔엉(Thuy Truong) 마을에 네 발 달린 아이를 낳은 부인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그녀는 미국과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꽝남(Quang Nam) - 다낭(Da Nang) 전장에 참가했던 도득토앗(Do Duc Thoat)의 부인이었다. 그는 눈이 튀어나오고 몸은 오그라들고 피부는 시퍼렜다.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수백 가지 약을 먹였으나 간과 뇌에 침투한 화학물질을 씻어내는 데는 아직도 별무소득이었고, 그는 피골이 상접하고 눈이 희미했다.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한 사람이 “전에 그의 눈은 아주 좋았는데 군대에서 돌아온 뒤로는 저렇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그의 아기를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는 숨김없이 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얇은 천에 배를 깔고 있는 아기를 보여 주었다. 토앗씨는 천을 잡아당겨 아기를 보여 주었다. 나는 서로 붙어있는 작은 네 개의 발을 보고는 몸서리쳤다. 실제로 두 개만이 발과 같은 모습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손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만약 그 두 개가 어깨에 붙어있다면 팔로 볼 수도 있지만, 기형의 팔이었다. 발에 붙어 난 기형의 팔이어서 네 발이 된 것 같았다.

 

그는 안쓰럽게 아들을 바라보면서 “적의 화학물질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그것이 내 몸속에만 있다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에게 유전되니 너무 괴롭다.”라고 말했다.

 

그 아기는 힘겹게 숨을 쉬다가 5일을 살고는 죽었다. 전에 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응웬득통(Nguyen Duc Thong)만이 보통 사람과 비슷하고 응웬득티(Nguyen Duc Thi)와 응웬득틱(Nguyen Duc Thich)은 모두 비정상이었다. 둘은 목이 마치 어깨에 붙어있는 것 같고, 쑥 빠져있으며 눈은 튀어나오고, 사시이며 팔다리가 휘어져 있고 피부가 노랬다. 티와 틱은 5살이 넘어서 죽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새로 아기를 낳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당반밍처럼 도득토앗도 가정의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이 아픔을 무의미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이 희생을 받아들인 것과 같이 그것을 받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웃들의 호의가 그와 네 자식의 아픔을 치료해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웃, 친구, 병원이 정성을 다했으나 1990년 5월 17일, 그는 영원히 세상을 떠났다.

 

투이즈엉(Thuy Duong) 면 2리의 라반즈억(La Van Duoc) 씨 집을 찾아가는 길은 울퉁불퉁하고 들쭉날쭉한 둑을 따라가야 했다. 그는 사이공 제1 군구(軍區) E268부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적에게 잡혀 푸꾸옥(Phu Quoc) 섬에서 3년을 보냈다. 그의 부인인 부이티방(Bui Thi Bang)은 쯔엉선(Truong Son:長山) 411 방공청년단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은 얼마나 많은 ‘폭탄 우’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얼마나 고엽제에 노출되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들은 건강하게 귀향하였고 부부가 되어 평온한 마을에서 따뜻한 보금자리를 꾸리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의지해서 영원히 지낼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중도하차할 줄을 누가 의심했겠는가? 그들 몸에 들어간 고엽제는 가정을 파괴했다. 네 명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불안한 운명을 살고 있다. 큰아들 라반쭝(La Van Trung)은 21살로, 눈은 하얗고 피부는 노랗고 말랐으며 어린애처럼 허약했다. 둘째인 라반중(La Van Dung)은 19살, 셋째인 라반뚱(La Van Tung)은 15살로 뇌에 유전되어 의식이 없는 것 같이 행동했다. 고엽제는 자식에게 유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의 머리에도 발병하였다. 목이 크게 부어오르고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사마귀 같은 것이 등과 배에 돋아나고 온종일 피가 나왔다. 머리는 망치로 때리는 것같이 아팠다. 세 달 이상을 고생하다가 그녀는 영원히 세상과 이별하면서 역시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동반자에게 장애 아이들을 남겨 놓았다.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비정상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이제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부인을 대신해서 목욕시키고 빨래하며 아이들을 돌보고 약을 사야 하고... 그는 너무도 힘들어 숨이 막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을 업고 하노이로 여러 번 치료하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나도 고엽제에 오염되었다. 그리고 감옥에서는 적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단지 걱정은 차후에 자식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 불쌍할 뿐이다.”

 

라반즈억의 집에서 멀지 않은 투이꾸잉(Thuy Quynh) 면에 있는 팜반삽(Pham Van Sap) 씨 집을 찾았다. 그는 닥또(Dac To)-떤까잉(Tan Canh)지역 전투의 소대장이었다. 처음 찾아온 손님에게는 누가 아버지고 누가 아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생존 투쟁을 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는 전쟁 때를 회고하면서 나에게 말했다.

 

1969년 9월 15일 그의 부대는 고지에서 포탄이 쏟아지고 미국 비행기가 고엽제를 투하하는 속에서 미군 중대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부대 전체에 마치 눈처럼 가루들이 쏟아졌다. 그는 고엽제와 파편이 정강이를 잘라서 기절하였다.

 

그의 두 자식은 현재 장애의 아픔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큰아들 팜반뚜언(Pham Van Tuan)은 22살로 백발이 되었고, 작은 딸 팜티하이(Pham Thi Hai)는 20살로 몸이 비뚤어져 제대로 걷지 못했다.

 

“하루는 우리 두 부자가 열이 올라 각자의 침대에 누워 있는데, 멀리 사는 친구가 찾아와 고개를 내밀자 그는 나를 친구라고 부르고 내 자식을 아저씨라고 불렀소. 그가 말하길 ‘자네 아버님도 편찮은가?’라고 물었소.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소. 자식의 장래가 어찌 될지 걱정이오.”

 

그는 한 다리는 전쟁터에 두고, 피는 다이옥신에 오염된 힘없는 2/4급 상이군인으로 자식의 약값을 마련하고자 자전거를 고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타이투이에서 우리는 전쟁터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조용한 동네인 흥(Hung Ha)으로 갔다. 현 상이군인과 과장인 부반하잉(Vu Van Hanh)을 만났다. 그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이미 죽은 아이들 외에도 현재 흥하현에만도 수 백 명의 아이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쯔엉선에서 심각하게 고엽제에 오염된, 원래 C271 방공청년대원이었던 하티허우(Ha Thi Hau) 부인을 찾아 박선(Bac Son) 면으로 갔다. 그녀는 자식 셋을 낳았는데 모두 장애인이고 그녀 자신은 전신마비 증상을 앓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 레수언당(Le Xuan Dang)은 312사단의 사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했다. 그는 10년이 넘게 전신 마비된 부인과 세 명의 장애 아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그것은 힘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이 회복되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회복될 것인가? 날로 병세가 악화하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레반주에(Le Van Due)는 얼이 빠진 상태에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온종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걷지도 못하면서 밤에 마당과 골목을 기어다녔다. 어떤 날은 아주 멀리까지 기어 다니기도 하고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열 살이 되자 더 심해져서 집을 나가기도 했다. 어떤 날 밤은 들판의 논에 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연못에 들어가 물을 푸기도 했다. 당씨는 “새벽 두 시에 자다가 깨서 옆에 자식이 없으면 정신없이 손에 전등을 들고 이 연못 저 연못으로 자식을 찾으러 다니다 비로소 자식을 둑으로 끌어 올렸다”라고 했다. 옷을 갈아입힐 때, 거머리가 겨드랑이와 배에 붙어있는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자식이 귀신에 들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자식놈의 몸이 뜨거워서 물속에 들어간다고도 한다. 올해 13살인데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탄식했다. 그는 아픔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집사람은 1996년 7월에 마비 증상이 최고조에 달했다. 눈을 감기 전 계속 눈물만 흘렸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나에게 ‘애들이 걱정입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차후에 누가 저들을 돌보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이웃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라고 위안을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자네와 애들이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웃 덕택이 아니냐고 했다. 집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고는 숨을 거두었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나는 전쟁 시 동료였던 마이반호앗(Mai Van Hoat)을 방문했다. 그는 F316-174부대의 중령이었고 현재는 타이빙시 푹 카잉(Phuc Khanh) 동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친구 간에 의리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누구도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그의 전쟁의 고통을 알기 어려웠다.

 

그의 부인은 평화가 왔던 해에 역시 첫 아이를 임신했다. 7개월째가 되어 그녀는 육감적으로 태아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떨 때는 휘젓는 것처럼 배가 아프고, 어떨 때는 배를 조이듯이 아팠다. 어느날 창자가 끊어지는 듯 아프고 나서 그녀는 미숙아를 낳았다. 단지 작은 두 눈만 사람 같고 몸은 털이 부스스한 고양이 같았다. 아기는 한 시간 정도 헐떡이다가 숨이 끊어졌다. 2년 후, 1977년 12월에 둘째를 낳았다. 아기는 털은 없었지만 기형이었다. 사시에다 언청이 그리고 피부가 파랐다. 마이티주엔(Mai Thi Duyen)이라고 이름 지었다. 클수록 기형이 심해지고 정신도 흐리멍덩했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 학대증이 심해졌다. 지난 20년 동안 발병을 하면 소리 지르고 할퀴고, 머리를 부딪치고 침을 흘리고 자해를 했다. 호앗씨 부부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온종일 ‘숙직’을 해야 했다.

 

고생스럽고 걱정이 되었지만, 정상아를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부인은 다시 셋째를 낳았다. 첫 아이의 불행을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기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의 반은 사람이고 반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호앗씨는 마이티지에우(Mai Thi Dieu)라고 이름 지었다. 아기는 앙상하고 주름지고 태어날 때 손목 크기였다. 10년이 되어도 겨우 손목만 했다. 앉을 수도 없고 단지 병든 고양이처럼 누워 있었다. 두 부부는 병든 두 자식을 함께 키워야 했다. 중령의 연금으로는 자식의 약값 대기에도 벅찼다. 그는 여위고 눈이 쑥 들어갔다. 평화가 온 지 20년이 넘었으나 그 부부는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었다. 주야로 자식이 발병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주야로 큰 자식의 고함 소리와 작은 자식의 끊임없는 신음 소리를 들어야 했다.

 

1989년 10월 4일 큰아이가 문밖 흙탕에서 뒹굴며 옷을 찢고 난리를 피울 때, 작은애가 자신의 몸을 할퀴면서 몸을 비틀다가 숨을 거두었다. 불행한 운명의 세 자식을 보면서 호앗씨는 그 자신이 참전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서 야기된 불행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는 서부 고원지대에서 10여 년 전투를 벌였다. 엄청난 포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향해서 가정을 꾸리고 이러한 꼴을 보고, 의사의 얘기를 듣고 보니 내 자식의 불행이 고엽제 때문인 것을 알았다. 죽은 두 자식과 남은 한 자식도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니 실탄도 맞지 않았는데 기절했던 것이 생각난다. 첫 번째는 1967년 5월 6일로 사쩨(Sa Tre) 고지 전투 후에 우리 부대가 사타잉(Sa Thay) 강변에 있는 후방으로 후퇴했을 때 미국 비행기가 고엽제를 뿌렸다. 우리가 주둔하고 있던 지역의 파란 나무들이 온통 우윳빛으로 덮였다. 많은 동료가 기절했고, 나는 정도가 심해서 꼬박 하루를 치료하고 나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며칠 후 나무들이 노랗게 변하고 줄기만 남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두 번째는 1970년 8월 9일로 자라이(Gia Lai)성 남쪽의 라이쩌(Lai Cho) 언덕에서 매복하고 있는데 발각되었고, 정신없을 정도로 포격을 하여 포연이 매캐할 정도였다. 그때 두 대의 비행기가 날아와 우리를 궤멸시키려는 듯 고엽제를 뿌렸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나고 목이 가렵고 어지러웠다. 잠시 후 나는 쓰러졌고,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때 그들에게 죽었다면 전투에서 희생된 것으로 더 간주할 것이고, 편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만난 호앗씨와 10명의 참전용사는 모두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높은 정신이 그들이 불행한 자식들과 함께 어렵게 생활해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전쟁의 다른 후유증을 처리하는 것 때문에 당국은 고엽제라는 몸속에 흐르는 숨겨진 상처 - 그러나 몹시 아픈 -에 대한 보상을 해줄 여건이 못되었다. 그것은 아버지 세대의 몸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식의 몸도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위안과 도움, 책임과 사랑으로 이 상처의 아픔 일부일지라도 나아졌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군인 자식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목격하였고 어머니의 눈물에서 나오는 처절한 소리를 들은 자로서 한마디하고 싶다.

 

양식 있는 미국인들이여,

다시는 베트남 전쟁에서와 같은

고엽제 참상을 일으키지 마시오.

양식 있는 미국인들이여,

당신들은 바로 당신들 때문에 생긴 수백 수천의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지시오.

그리고 양식 있는 모든 사람이여,

우리는 지구상 그 어떤 곳이라도 이와 같은

죄악이 허용되지 않도록 뿌리부터 막아야 할 것이오.

 

출처 : Bao Van Nghe, No.30 1997.7.26 p.10 and 15

 

번역 : 배양수/부산외대 베트남어과 교수

 

**고엽제(枯葉劑, defoliant)는 초목 및 잎사귀 등을 말라죽게 하는 역할을 하는 제초제를 말한다. 농약으로 독극물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인체에까지 피해를 주는 물질로 악명이 나있다. 베트남 전쟁 무차별 살포된 고엽제는 에이전트 오렌지였다.  농작물 피해뿐이 아닌 400만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지금도 지독한 후유증과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응웬밍쭈옌(Nguyễn Minh Chuyên)은?

 

1948년 생으로, 본명은 응웬밍쭈옌(Nguyễn Minh Chuyên)이다. 하노이 종합대 문과를 졸업했고, 1967년 동남부 지역의 전투에 참여해 전장에서 10년을 군의관으로 보냈다.

 

1976년 타이빙(Thai Binh) 신문의 기자로 근무를 시작해서 타이빙성 문학예술협회 상임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방랑자는 혼자가 아니다’ ‘전쟁의 유산’ ‘순교자는 영혼이 반쪽’ ‘오렌지의 영혼’ 등 문학, 언론, 영화 및 텔레비전 작품을 통해 베트남 전쟁 이후에 대한 글을 주제로 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또한 타이빙성의 지원을 받아 ‘전후작품박물관’을 지었다. 82개 문학작품과 그가 저술하고 감독한 255개의 다큐멘터리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600개 이상의 문서, 이미지 및 유물을 소장했다. 고엽제 등 전쟁범죄 피해자의 상실과 고통과 함께 생명을 갚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투영되었다.

 

2008년부터 베트남 텔레비전(VTV)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원로 감독으로 있다. 그동안 2006년 제10회 한국국제영화제에서 국제골드컵상 등 105개의 상과 표창을 받았다. 그의 군인과 아들 등 주제를 다룬 저서 중 70%가 미국 하버드대학교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연구 및 보관되어있다.

 

2017년 국가 주석으로부터 제4차 국가 문학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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