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원의 동티모르 워치
[최창원의 동티모르워치 18] 딜리의 붉은등: 상권 장악한 차이나머니
딜리(Dili)의 아우디안(Audian) 거리를 처음 걷는 사람은 잠시 헷갈린다. 간판의 한자, 처마에 매달린 붉은 등, 유리창에 덕지덕지 붙은 세일 스티커. 이것이 동티모르의 수도인지, 아니면 중국 남부 어느 소도시의 변두리 골목인지. 선반마다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빼곡히 쌓인 가게 안에서 중국어가 오간다. 주인은 손님에게 테툼어로 가격을 말하고, 돌아서면 동료에게 그들만의 언어인 객가어(중국 광동성 동부·복건성 서부·장시성 남부) 방언으로 속삭인다. 필자가 동티모르에 거주하는 기간내내 해가 갈수록 중국계 가게는 늘었다. 티모르 현지인들의 소규모 상점은 줄었다. 그러던 어느날, 필자가 살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중국인 운영 상가 하나가 불에 탔다. 밤사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다음날 새벽 검게 그을린 간판만 남아 있었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말이 많았다. 현지인과 관계가 나빠진 것이 화근이 됐다는 얘기가 설왕설래했다. 누가 불을 질렀다는 명확한 결론이 나온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화재는 내게 단순한 사고 이상의 무언가를 알려 주었다. 상권을 잠식해 가는 중국인을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불편한 시선, 그 눈빛이 연기 속에 스며 있는 것 같았다. 중국인과 티모르 섬의 인연은 오래됐다. 중국인들이 티모르 섬의 연안에 처음 나타난 것은 14세기의 일이다. 그들은 티모르의 풍부한 백단향(白檀香, sandalwood) 교역에 누구보다 일찍 눈을 뜬 사람들이었다. 향과 약재로 쓰이는 이 백단향 나무가 두 세계를 처음 잇는 무역로를 만들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마카오에서 건너온 중국 상인들이 포르투갈 지배 구역에서 교역 관계를 굳히며, 이들은 워낙 저렴한 중국산 물건을 들고 왔기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경쟁에서 밀린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18세기에 이르러 마카오에서 대규모 화교들이 티모르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1769년 수도가 오에쿠시의 리파우(Lifau)에서 딜리로 옮겨지자 이들도 딜리로 따라 이동했다. 포르투갈 식민 당국은 이들을 멸시하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했다. 포르투갈 당국은 화교들이 영토의 상업적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톱니바퀴임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한 경멸적으로 대했다. 화교 이민의 주축은 결국 객가(客家, Hakka)인이 됐다. 포르투갈령 티모르에는 세 갈래의 중국계 이민자가 있었다. 복건(福建, Hokkien) 계통의 선구자들이 도시를 거점으로 교역에 종사했고, 광동(廣東)성 주강 삼각주와 매현(梅縣) 지역 출신의 객가인들은 도시 외곽 농촌으로 파고들었으며, 광동 출신의 광동어 사용자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대거 유입된 객가인은 20세기 초에 화교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됐고, 1975년 무렵에는 전체 화교의 85~90%가 객가인이었다. 식민지 시대 말, 딜리는 화교 사회의 문화적·제도적 중심지가 되었고, 외딴 오지라 할지라도 "적어도 하나쯤 중국인 상인이 없는 농촌 지역은 거의 없었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필자가 동티모르국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 마을 어귀마다 낡은 간판의 '치나 가게(Loja Xina)'를 만날 수 있었다. 덩샤오핑도 리콴유도 객가인의 피를 이어 받았다. 세계 어디에나 흩어져 뿌리내리는 것으로 유명한 이 사람들이, 지구상 가장 외진 포르투갈 식민지에도 터를 잡았다. 1975년은 화교 사회에 재앙이었다. 인도네시아 군이 쳐들어오자 많은 화교-티모르인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압박을 피해 영토를 떠났고, 대만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약 600명의 화교가 딜리를 등지고 대만·홍콩·마카오·호주로 흩어졌다. 독립 이후에도 1999년·2006년 폭력 사태로 딜리의 화교 소유 기업들이 방화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많은 이들이 다시 피신할 기회를 잡았다. 중국인을 겨냥한 불길은 어느 시대에도 꺼지지 않았다. 그런 역사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있다. 발리보 출신의 화교-티모르인 제이프 콩 수(Jape Kong Su)는 1975년 인도네시아 침공 때 고향을 등지고 호주 다윈으로 피신했다가 1976년 제이프 그룹(Jape Group)을 창업했고, 1999년 독립 이후 귀환하여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힘을 보탰다. 제이프가 딜리에 지은 티모르 플라자(Timor Plaza)는 호텔·오피스·아파트를 포함해 5,000만 달러 이상이 투입된 동티모르 최대 민간 투자 프로젝트다. 2011년 개관한 이 쇼핑몰은 국가 재건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제이프는 2022년 9월 26일 호주에서 사망했다. 의회는 그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고, 라모스 오르타 대통령이 직접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현지 NGO '마타달란 바 라이-하부라스'는 티모르 플라자 건설로 많은 가족이 강제 퇴거당했다고 비판했다. 화교 자본의 귀환이 모두에게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티모르 플라자는 화교 경제력의 정점이지만, 그 저변은 훨씬 넓다. 화교-티모르인 사회의 3대 기업으로는 티모르 플라자를 소유한 제이프 가문 외에, 리더(Leader)-리타 스토어(Lita Store)-도요타 판매점을 운영하는 AKAM, 그리고 스타 킹(Star King)이 꼽힌다. 대형 쇼핑몰에서 자동차 대리점까지, 딜리 비즈니스 지형도의 굵직한 자리를 화교 자본이 채우고 있다. 그 아래로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왔다. 대를 이어 티모르에 뿌리를 내린 화교-티모르인이 아니라,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신흥 이민자들이다. 딜리 메인 도로를 따라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들, 통일된 간판, 구정(춘절)의 붉은 장식이 이제는 전형적인 풍경이 됐다. '1달러 숍'이라 불리는 중국 본토계 잡화점들이다. 동티모르가 미국 달러를 자국 통화로 사용한다는 화폐 안정성이 저위험 투자처를 찾는 중국 기업인들을 끌어들이고, 규제가 거의 없어 외국 상점이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미래의 고층 건물들이 모두 이 가게들 소유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필자가 아는 딜리의 작은 구멍가게 주인은 2015년 가게를 접었다. 바로 옆 블록에 중국계 대형 잡화점이 들어선 지 1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가격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쪽은 중국에서 직접 컨테이너로 들어오는데, 나는 중간상에서 사야 하니까요." 그는 지금 오토바이 택시 기사로 일한다. 젊은 티모르인들은 편리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중국 상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동티모르 상공회의소의 한 대표는 중국 상품의 유입이 티모르인들에게 실질적인 혜택 없이 돈만 빠져나가는 구조가 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명했다. 내가 목격한 그 화재는 이 묵은 갈등이 밤의 연기처럼 피어오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골목 상권만이 아니다. 중국은 딜리의 대통령궁, 외교부, 국방부 건물을 지어줬다. 동티모르 역사상 최대 민간 인프라 사업인 티바르(Tibar) 컨테이너 항구는, 프랑스 볼로레 그룹이 30년 콘세션 계약을 맺어 운영하되, 건설은 중국 국유 기업 중국항만건설공사(CHEC)가 담당했다. 30년간 예상 총투자액은 5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핵공업 22건설(CNI22)은 2008년 3억 6,0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고 동티모르 북부와 남부에 두 개의 발전소를 짓고, 750km의 고압송전선 확장과 10개 변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을 수행했다. 건설 현장에서는 고용 문제도 불거졌다. "코로나 이후 딜리에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건설 현장 인력은 모두 중국인과 인도네시아인들이라 현지인이 취업하기가 어렵다"는 현지인의 목소리는 투자가 반드시 현지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티바르 항구 같은 대형 사업들도 중국이 직접 투자한 것이 아니라, 경쟁 입찰로 공사 계약을 따낸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투자액보다 국가 인프라의 어느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다. 호주 국립대학교 국가안보대학의 페이(Andrea Fahey) 박사 과정 연구원은 "구스마오 정부는 특정 사업이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될 때마다 중국 투자자들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분석한다. 딜리 중심부에는 1928년에 지어진 구관제(關帝廟)묘가 지금도 서 있다. 붉은 기둥과 향 연기. 수백 년 전 백단향 배를 타고 온 객가인의 후손들이 제를 올린다. 아우디안과 쿨루훈의 외곽 산업 지역에서 화교 운영 상점들은 여전히 번창하고 있으며, 생활용품, 가전제품, 플라스틱 용기, 장난감, 조화, 어린이 옷 등을 판다. 이 가게들 곁에, 이제 신진 대륙 자본이 세운 3층 콘크리트 건물이 나란히 서 있고, 한편에는 동티모르 최대 쇼핑몰이 딜리의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다. 600년의 역사와 현재의 자본이 층층이 쌓인 풍경이다. 14세기 백단향 무역에서 시작된 인연이 18세기 마카오 이민으로 이어지고, 독립 이후 귀환한 화교-티모르인의 투자와 본토 자본의 파도가 겹쳐졌다. 그 파도가 골목 잡화점에서 쇼핑몰, 항구, 발전소, 전력망으로 번져가는 동안, 딜리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를지도 모른다. 원인을 누구도 단정짓지 못하는, 그 익숙한 연기가.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자본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무엇을 키우는지는,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문제다. 외국 중에서 가장 깊숙이 동티모르 사회에 파고든 중국이, 반감 또한 가장 크게 쌓이고 있는 역설.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가 그 답을 어떻게 내놓을지, 필자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최창원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hopeseller@gmail.com 최창원 프로필 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세안센터 연구위원 현, 아시아비전포럼 선임연구원 현, 한국스피치웅변협회 동티모르 지부장 전,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방문학자 전, 동티모르국립대 교수, 한국학센터장 전, UNDP 아름다운동티모르 만들기 프로젝트 자문관 한글 발전 및 한국어 세계화 공로로 대통령 표창(2025) 『테툼어–한국어 사전』, 『한국어–테툼어 사전』 동티모르 말모이팀 편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