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배양수의 Xin chào3] 베트남은 정말 ‘모계사회’였을까?
아세안(ASEAN)은 동남아 10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성원은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대륙의 5개국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브루나이 등 해양국 5개국이다. 최근 한국과 관련에서 가장 큰 나라가 베트남이다. 삼성전자 등 한국 글로벌이 진출하고, 교민도 급속히 늘어나고, 한국 유학생 중 중국에 이어 가장 큰 나라가 베트남이다. 한국관광객이 가장 찾는 동남아 국가도 베트남이다. 이렇게 급속히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아세안익스프레스가 생활 속에서 찾아보는 베트남의 언어, 습속, 그리고 문화 등을 조명하는 연재를 시작한다. 부산외대 교수로서, 그리고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인 배양수 교수의 베트남 시공간 여행을 동반할 수 있다. [편집자] --------------------------------- “베트남에는 아직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다.” 베트남을 소개하는 여행 책자나 교양서, 인터넷 칼럼에서 가끔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신화 속 ‘민족의 어머니’ 이야기, 중부고원 지역 소수 종족의 독특한 결혼 풍습, 가족 안에서 강한 어머니의 존재감 같은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베트남은 원래 모계사회였고 지금도 그 흔적이 짙다”라는 인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역사-인류학 연구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이 이미지는 매력적인 만큼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베트남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가리는 ‘로맨틱한 오해’에 가깝다. 1. 다수 사회인 ‘낑족’은 분명한 부계사회다 먼저 짚어야 할 기본 사실이 있다. 오늘날 베트남 인구의 약 85%를 차지하는 다수 종족, 낑족(Kinh)의 친족-가족 구조는 분명한 부계 친족-부거(父居) 거주 체계라는 점이다. 성(姓)과 씨족은 아버지를 통해 이어지고, 족보도 남계 중심으로 작성된다. 조상 제사와 마을 제의의 조직 단위도 부계 씨족이며, 제사 계보에서 중심은 아들이다. 결혼 후에는 전통적으로 남편 집 또는 그 인근에 거주하는 것이 규범적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인상이나 관찰이 아니라, 마을 문서, 씨족 족보, 제사 규약 같은 구체적인 자료와 수많은 현지 조사가 반복해서 확인해 준 결론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베트남 다수 사회는 부계사회였다”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아주 타당하다. 또 베트남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였던 반랑국 시기의 구장껌(Trầu Cau) 설화도 당시 베트남 사회가 부계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자료로 읽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두 형제와 한 여성(아내)의 삼각관계에서 출발한다. 형제 간의 의리, 부부 관계가 비극적으로 꼬인 뒤, 각각이 빈랑나무, 석회암, 빈랑잎으로 변해 하나의 의례적 세트를 이룬다. 여기서 중심축은 일관되게 형제라는 남성 혈족 관계이며, 아내는 그 관계에 편입되는 위치에 머문다. 이 설화는 남성 혈족 중심의 친족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표현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 “베트남은 원래 모계사회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2. ‘고대 모계사회’라는 이야기의 배경 이 서사는 몇 가지 요소가 겹치면서 만들어졌다. 첫째, 19세기 서구 인류학이 만들어낸 직선적 진화 모델이다. “인류는 처음엔 모계 중심이었고, 사회가 ‘문명화되었다’고 여겨지면서 부계 중심으로 발전했다”라는 도식이 한때 전 세계 사회를 설명하는 만능 틀처럼 쓰였다. 이 틀이 베트남에 기계적으로 적용되면서, “지금은 부계사회니까 옛날에는 모계사회였겠지”라는 가정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둘째, 신화의 민족주의적 재해석이다. 베트남 건국 신화인 어우꺼–락롱꿘(Âu Cơ – Lạc Long Quân) 신화에서 “민족의 어머니 어우꺼” 이미지는 민족주의와 여성주의 담론 속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됐다. 이 상징이 “고대 모계사회의 흔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를 곧바로 사회 구조의 증거로 쓰는 것은 학문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20세기 이후 정치·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따라 신화가 재해석·강조되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이야기 하나로 “베트남은 원래 모계사회였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셋째, ‘여성이 강하다’는 인상을 곧바로 ‘모계사회’로 연결하는 습관이다. 베트남에는 역사적으로 여성 장군, 여성 지도자, 여성 시인들이 적지 않다. 오늘날에도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크고, 외가와 어머니의 영향력이 실제 생활에서 매우 강하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여성이 강한 사회 → 모계사회”라는 공식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성이 강하다”는 것은 권력, 문화, 성 역할의 문제이고, “모계사회”는 혈통, 상속, 제사, 거주 규범 같은 친족 구조의 문제다. 이 둘을 섞어 버리면, 강한 어머니상 = 모계사회라는 단순하고도 위험한 결론에 빠지기 쉽다. 3. 그렇다면 ‘진짜 모계사회’는 어디에 있나? 그렇다고 베트남에 모계 전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범위가 ‘베트남 전체’가 아니라, 일부 소수 종족에 한정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표적인 예가 중부고원과 남중부 지역의 에데(Êđê), 자라이(Gia Rai/Jarai) 족이다. 이들 공동체에서는 혈통과 씨족 소속이 여성을 통해 전해지고, 결혼 후 남편이 아내 집으로 들어가는 모거(uxorilocal) 관습이 일반적이며, 막내딸이 집과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면 단순히 “여성의 영향력이 크다”가 아니라, 친족 체계 그 자체가 모계적(matrilineal)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일부 므농(Mnông), 짬(Chăm) 족에서도 다양한 수준의 모계·양계적 요소가 보고된다. 따라서 “베트남에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다”라는 문장은, 좀 더 정확히는 “에데, 자라이 등 특정 소수 종족 공동체에서 모계제 친족 구조가 오늘날까지 유지·변형되어 왔다”라는 의미로 한정해 써야 한다. 이 말을 낑족을 포함한 ‘베트남 전체’로 확대하면 그때부터는 사실 왜곡이 된다. 4. 베트남 가족은 ‘부계 이념 + 양계 실천’에 가깝다 한편, 낑족 사회를 두고 “전형적인 부계사회”라고만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서류와 제도, 의례의 차원에서는 분명 부계 중심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로 들어가 보면, 어릴 때 외가에 맡겨져 자라는 아이들, 양가 부모를 모두 부양해야 하는 성인 자녀, 처가·외가가 제공하는 돌봄·경제적 지원, 이주·취업 정보, 육아 도움을 주고받는 촘촘한 친족 네트워크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족 경험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래서 많은 인류학자들은 베트남 낑족의 가족 구조를 “부계 이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실제 실천에서는 양가를 모두 중시하는 구조”로 설명한다. 이때 일부 사람들은 이런 양계적 현실을 보며 “모계 전통”이라는 말을 쓰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모계사회가 아니라, 부계적 틀 안에서 양계적 실천이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에 가깝다. 5. 왜 이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을까? “베트남은 원래 모계사회였다”라는 말은 언뜻 듣기에는 흥미롭고, 여성에게 우호적인 스토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문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역사적 현실을 흐린다. 베트남 다수 사회의 부계-부거 구조, 여성들이 실제로 부딪혀 온 제도적 한계를 가리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소수 종족의 현실을 지운다. 모계 전통을 실제로 유지해 온 에데, 자라이 등의 구체적인 역사와 문화는 사라지고, 막연한 “베트남 전체의 모계사회”라는 이미지만 남는다. ‘강한 어머니’ 이미지를 낭만화한다. 가족과 사회의 부담을 짊어진 여성의 현실이 “원래 모계사회라 그렇다”는 말 속에 포장되면서, 구조적 문제에 관한 질문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종합하면, “베트남은 원래 모계사회였다”라는 문장은 매력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인류학 연구가 보여주는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면, “강한 어머니 상징”이라는 한 장면에 머무르기보다는 다수 종족 낑족의 부계-부거 구조, 소수 종족의 실제 모계제 관습, 그 사이에서 오가는 양계적 가족 실천을 함께 보는 입체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그 지점에서 비로소 “베트남의 가족과 젠더”라는 주제가 관광안내 책자 속 로맨틱한 문장이 아니라, 현실과 마주하는 진짜 이야기로 다가올 것이다. 부산외대 베트남어과 배양수 배양수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1호 한국유학생이자 1호 박사다. 베트남 문학작품인 『끼에우전』과 한국의 『춘향전』을 비교한 석사학위논문은 베트남 현지에서 많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노이사범대학교 어문학과에서 100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본주의권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 호치민 종합대대학원 입학한 배양수 교수.. 한국 최초 베트남 유학생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경향신문. 1995년부터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베트남 문화의 즐거움 』, 『중고등학교 베트남어 교과서』, 등의 저서와 『시인 강을 건너다』, 『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베트남 사람들』, 『정부음곡』, 『춘향전』 등의 번역서가 있다. 2024년 12월 24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30주년 기념식 및 정년퇴임식’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