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흔히 ‘불교국가’로 불린다. 그러나 실제 태국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 믿음의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반얀트리에 둘린 오색 천, 가게 앞에 놓인 바나나 제물, 얼룩말과 닭 조각상, 그리고 대학 캠퍼스 한복판에 자리한 가네샤상까지—태국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종교적 상징들이 경쟁 없이 공존한다. 불교-힌두-정령신앙이 얽혀 하나의 생활 세계를 이룬 이 풍경은 종교가 갈등의 원천으로 비쳐지기 쉬운 현대 사회에서 다시 한번 ‘믿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 나무에 깃든 영혼: 애니미즘이 보여주는 ‘장소의 신성화’
태국의 오래된 반얀트리는 단순히 그늘을 드리우는 자연물이 아니다. 주민들은 그 안에 ‘정령’ 혹은 ‘귀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나무에 오색천을 두르거나 그 아래에 제물을 바친다.
이는 동남아 전역에서 널리 퍼진 정령신앙의 한 형태로, 인간이 살기 전부터 존재한 자연에는 고유한 주인이 있다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큰 나무는 그 자체로 ‘영혼이 머무는 집’으로 이해된다.
색동천을 두르는 행위는 그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신성함과 감사를 표현하며 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제의로 기능한다. 특히 ‘매낭마이(แม่ นาง ไม้)’라 불리는 여성 정령이 복권 번호를 점지해 준다고 믿는 사례는, 전통적인 애니미즘이 현대 사회의 욕망, 즉 로또와 행운 추구와 결합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나무 아래 놓인 통나무 의자들 또한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잠시 쉬어 가는데, 이때 휴식의 공간은 동시에 정령에게 인사하고 마음속 소망을 조용히 비는 신앙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태국의 정령신앙은 불교가 유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불교에 완전히 흡수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독자적인 위상을 유지한 채 공존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태국 종교문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 가게 앞 바나나 제물: ‘언어–상징–생활’이 얽힌 실용적 신앙
태국에서 쉬운 일을 가리키는 말인 “바나나 껍질 벗겨서 입에 넣기”라는 표현은 단순한 일상적 관용구가 아니다. 이 표현은 실제 제의 행위와 결합하여, 가게 앞 지신에게 바나나를 바치는 풍습으로 이어진다. 바나나는 모든 일이 매끄럽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한다.
자영업자에게 지신은 가게의 매출과 손님의 왕래, 사업의 번영을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불안정한 경제 환경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지만, 제물과 향을 올리는 행위는 그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된다.
다시 말해, 제의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장치이며, 종교적 실천은 추상적 교리를 믿는 행위라기보다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유용한 도구로 활용된다. 태국인의 신앙이 지극히 실용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닭·얼룩말·음료수 제물: 일상적 사물의 신앙적 전환
가게 앞에 놓인 닭 조각상과 그 앞에 진열된 음료수 역시 단순한 장식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태국 사회에서 동물 조형물은 분명한 상징적 효능을 지닌다. 닭은 재물을 불러들이는 동물로 여겨지며, 닭의 부리가 모이를 쪼듯이 돈을 하나하나 찍어 모아 온다는 믿음이 투영되어 있다. 닭의 해에 태어난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준다는 인식도 여기에 더해진다.
얼룩말의 경우 그 상징성은 보다 현대적인 도시 경험과 맞닿아 있다. 태국에서 횡단보도는 ‘얼룩말 길’이라 불리는데, 이 이미지가 곧 안전과 보호, 무사함을 뜻하는 신앙적 기호로 변용된 것이다. 도로 주변 브라흐마 신상 곁에 줄지어 놓인 얼룩말 조형물은, 현대 교통 체계의 기호가 토속신앙과 만나 재해석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상징의 기원은 종교적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상 언어와 사회적 경험이 종교적 상징체계 안에서 재구성되면서, 닭과 얼룩말 같은 사소한 존재들도 신앙의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 싼프라품(땅의 신이 머무는 집): 태국 신앙체계의 ‘핵심 축’
태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싼프라품, 즉 땅의 신을 모시는 사당은 이 사회의 신앙체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 축으로 기능한다. 가정과 가게, 회사, 학교, 관공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공간의 입구에는 작은 집 모양의 사당이 세워져 있다.
이 사당은 ‘땅의 신(เจ้าที่)’에게 바치는 집으로, 그 땅의 원래 주인을 존중하고 그 위에서 살아가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예식의 중심이다. 싼프라품을 통해 드러나는 태국적 세계관은 분명하다. 인간은 땅을 마음대로 점유하는 주인이 아니라, 이미 영적 존재가 자리 잡고 있던 공간에 임시로 머무는 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다. 사당 안에 모셔진 할아버지·할머니 상(像)은 이곳을 지켜주는 ‘조상’의 은유로, 조상숭배와 토지신앙이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 사원이 가까이에 있어도 사람들은 대개 먼저 싼프라품에 향을 피운다는 사실이다.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다루는 구원과 윤회의 문제와, 일상적 안전·질병·장사와 관련된 실용적 문제를 서로 다른 차원으로 나누어 받아들이는 태국인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이처럼 싼프라품은 공동체가 공간을 대하는 규범을 설정하고, “이곳은 누구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성스러운 영역”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문화적 기억 장치의 역할도 담당한다.
■ 가네샤와 불상이 나란히 있는 캠퍼스: 열린 종교문화의 대표적 풍경
태국의 대학 캠퍼스에 서 있는 가네샤상은 이 나라의 열린 종교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학업·승진·재물·지혜를 상징하는 힌두신 가네샤는 태국인에게 매우 실용적인 ‘성취의 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시험 기간이면 가네샤상 앞에 향을 피우고 합격과 성적 향상을 기원하는 학생들을 목격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힌두신의 옆에 불교의 불상이 모셔진 몬돕이 자연스럽게 자리한다는 점이다. 두 종교의 상징물은 서로를 배제하거나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동반자처럼 공존한다. 태국 상좌부 불교는 교리적으로는 상당히 엄격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일상 실천의 수준에서는 매우 유연하게 다른 신앙 요소들을 수용한다.
인도 힌두교의 의례와 신상 숭배, 화려한 색채 문화가 그대로 일상 속에 흡수되고, 중국 도교적 요소인 풍수나 숫자 신앙이 부분적으로 결합하며, 정령신앙과 무속적 실천 역시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다층적 수용 구조는 태국 불교가 단순한 ‘종교 제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문화적 풍속 전체를 포괄하는 생활철학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태국 신앙의 핵심 특징: 실용성, 관용성, 비배타성
이처럼 태국인의 신앙을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은 실용성, 관용성, 비배타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태국에서 종교적 실천은 절대적 진리를 따지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택지에 가깝다. 지혜와 학업 성취가 필요할 때는 가네샤에게 기도하고, 안전이 걱정될 때는 얼룩말을 상징적으로 두며, 사업이 막히면 지신에게 바나나와 음료를 바치고, 불안한 공간에는 나무 정령에게 천을 둘러 보호를 구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신이 더 옳은지가 아니라 그 신앙이 특정한 순간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이다.
이러한 태도 속에서 한 사람의 삶 안에 불교·힌두·애니미즘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서로를 배제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교리 체계를 지닌 기독교나 이슬람과는 대조적이다. 태국적 신앙문화에서는 여러 믿음이 동시에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며, 필요에 따라 그 기능이 선택된다.
이 비배타성은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한다. 서로 다른 신앙이 우열을 가리기보다, 각자의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실질적 도움을 제공하기 때문에 종교를 둘러싼 충돌의 가능성이 낮다. 신앙을 삶의 문제를 다루는 실천적 도구로 이해하는 관점은 다원성이 충돌하는 시대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종교가 ‘진리의 경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위로와 실천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태국 사회가 보여주는 신앙의 조화로운 풍경은, 서로 다른 신념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태국인의 신앙을 깊이 이해할수록, ‘Thai(자유로움)’라는 단어가 품은 자유로움·유연함·관용이라는 의미가 종교문화 속에도 깊이 배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태국=정환승 객원기자, 태국 랑싯대학교 한국어과 학과장 chaiyothai@hanmail.net
정환승 교수 프로필
그는 언어학자다. 그리고 문화학자다. 정환승 랑싯대학교 한국어과 학과장은 스스로 “한태관계발전에 이바지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국어를 전공했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학과 태국어과에 입학한 1983년부터 교수로 정년퇴임하는 2023년까지 태국어와 태국문화에 홀린 듯이 살아왔다. 그는 한국-태국 정상회담에서 통역을 맡을 정도로 안팎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2019년에 ‘황톳길 위에서 미소를 만나다’를 펴냈다. 쑤코타이, 아유타야, 톤부리, 그리고 랏따나꼬신(방콕)왕조의 유적지를 돌아본 여행기다. 태국의 문화유산답사기인 셈이다. 또한 ‘담장너머의 태국, 치앙마이-치앙라이 오디세이’를 5년간 공을 들여 출간했다.
2023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9월부터 태국의 랑싯대학교 한국어과 학과장으로 인생 이모작을 시작했다. 2020년 태국에서 13번째 한국어과를 설립을 주도한 이가 정 학과장이다. 랑싯대학교는 태국의 빠툼타니 주에 위치한다. 어느 대학보다 한국어 교육에 많은 힘을 쏟는 대학으로 잘 알려졌다.
아세안익스프레스가 태국을 단순히 언어를 넘어서 사회와 문화, 역사에 웅숭깊은 내공을 보여주는 정환승 교수의 [정환승 태국풍경]을 시작한다. [편집자주]
현 태국 랑싯대학교 한국어과 학과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태국어통번역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 학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동남아연구소장-한국태국학회 회장
1999-2002-2005년 한국-태국 정상회담 통역
1958년 한국과 태국이 수교한 해 태어남
1995년 태국 쏭클라대학교 대학원에서 태국어학 석사
2000 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언어학 박사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한 해 태어난 딸은 베트남 아시아투데이 특파원(정리나)
최근 저서로는 ‘태국 들여다보기’, ‘태국역사문화기행 황톳길 위에서 미소를 만나다’,
‘담장너머의 태국 치앙마이-치앙라이 오디세이’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