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맥킨지글로벌연구소가 내놓은 ‘지정학과 글로벌 교역의 기하학: 2026년 업데이트(Geopolitics and the Geometry of Global Trade: 2026 Update)’는 오늘의 세계 무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준다.
보고서의 첫 문장은 통념을 깨뜨린다. 2025년 세계 무역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경제 성장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 다만 그 무역은 예전처럼 “효율(efficiency)”만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더 가까운 지정학적 파트너를 향해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은 약 30% 줄었고, 미국은 중국산 공백의 약 3분의 2를 다른 나라 수입으로 메웠다. 중국은 완제품보다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을 늘리며 “세계의 공장”에서 “공장의 공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의 또 다른 축은 AI(인공지능)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무역 증가의 약 3분의 1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장비 같은 AI 관련 품목이 이끌었다. AI 관련 교역은 전 세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약 40% 가까운 성장세를 보였다. 반대로 에너지 자원 교역 가치는 줄었다. 이제 세계 무역의 주인공은 원유와 벌크 화물이 아니라 칩, 서버, 네트워크 장비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재편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어디일까. 보고서는 주저 없이 아세안을 가리킨다. 2025년 아세안의 제조업 수출은 약 14%, 수입은 11% 늘었다. 미국으로의 수출은 약 800억 달러 증가했고,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1,000억 달러 이상 늘었다. 이 숫자는 아세안이 단순한 “중국 대체지”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아세안은 중국에서 더 많은 부품과 설비를 들여오고, 미국과 세계시장으로 더 많은 완제품을 내보내는 연결 플랫폼이 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아세안 내부의 역할 분화다. 전자산업은 이미 아세안 수출의 약 45%, 연간 수출 증가의 70%를 차지한다. 베트남은 노트북과 스마트폰의 최종 조립 허브로, 캄보디아는 섬유 생산의 대체기지로 떠올랐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AI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부상했다.
특히 말레이시아는 반도체의 조립-패키징-테스트를 담당하는 중요한 축으로 지목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철강, 비료, 화학제품, 광물 등 자원형 수출의 비중이 크다. 하나의 아세안이 아니라, 기능별로 분화된 여러 개의 아세안이 함께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크다. 우리는 흔히 아세안을 값싼 생산기지, 혹은 성장하는 소비시장으로만 본다. 그러나 이제 아세안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중 경쟁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AI가 무역의 주력 엔진이 될수록, 아세안은 중국의 생산역량, 미국의 수요, 한국과 대만의 기술, 일본의 장비를 이어주는 교차점이 된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 더 이상 단순한 양자관계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기하학으로 바뀌고 있다면, 아세안은 그 네트워크의 가장 역동적인 결절점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대아세안 전략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아세안을 더 이상 “중국 리스크 분산용 대체지”로만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인 시각이다. 아세안은 이미 독자적 제조생태계와 역내 공급망을 갖춘 생산 허브다.
둘째, 한국은 아세안과의 협력을 단순한 무역 확대가 아니라 AI·반도체·디지털 인프라·에너지 안보를 함께 묶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셋째, 아세안 전체 그림을 보면서 국가별 접근도 더 정교해야 한다. 베트남은 전자 최종 조립, 말레이시아는 반도체 후공정, 싱가포르는 금융-데이-고부가 서비스, 인도네시아는 광물과 자원, 태국은 중간재와 조립이 결합된 복합 제조기지로 접근해야 한다.
보고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아세안의 교역 증가는 미국과 중국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교역 증가의 절반 이상이 두 나라 이외 시장과 연결돼 있었고, 역내 교역도 늘었다. 다시 말해 아세안은 어느 한 진영에 줄 서는 지역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진영을 연결하면서 스스로의 전략 공간을 넓히는 지역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아세안이 가진 진짜 힘이다.
세계 무역은 지금 거대한 재배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재배치는 공장의 철수나 컨테이너의 이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 지정학, 시장, 공급망이 함께 만드는 새 질서의 형성 과정이다. 그리고 그 질서의 중심부에 아세안이 있다.
한때 아세안은 세계 무역의 주변부로 보였다. 이제는 다르다. 아세안은 더 이상 “누군가의 대체재”가 아니다. 오히려 미·중 경쟁과 AI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 무역의 허브이자 연결자다. 앞으로 한국이 세계 무역의 새 지도를 읽으려면, 미국과 중국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이를 잇는 아세안을 더 깊고 넓게 보아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21세기 통상질서의 다음 장면이 먼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서정인 전 아세안대사 jisuh0803@gmail.com
서정인 전 아세안대사는?
외교부 공보과장 및 동남아과장, 남아시아태평양국장, 역임했다. 이후 아세안 대사, 태국 공사참사관에서 최근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장까지 20여년 이상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업무를 했다.
<한-아세안 외교 30년을 말한다>(2019), <아세안의 시간>(2019) 단행본 공동 편집 및 특별기고를 했으며, 정기 간행물 외교지 기고 및 아시아 경제, 부산일보 고정 칼럼을 비롯해 매경, 한국 등 일간지에 동남아 및 아세안 관련 기고를 했다.
고려대 아세안 센터 연구위원, 아세안-동아시아 경제연구소(ERIA) 이사, 아세안안보포럼 전문가 그룹(ARF EEPs) 일원이며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도 역임했다.





